자신의 제자들을 위안부로 팔아버린 친일파 김활란

2017년 9월 18일   정 용재 에디터

이화여전을 이화여자대학교로 개편한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자 최초의 총장.

많은 여성들을 대표하는 지식인 이미지에 가려진 그의 친일 행적들을 알아보자.

●이화여대 초대 총장 김활란

金活蘭.

창씨개명한 이름은 아마기 카츠란(天城活蘭).

1899년 1월 18일 ~ 1970년 2월 10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교육인, 언론인, 이화학당 졸업생,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

YWCA의 창립자,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 등 중요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조선 여인들의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악질 친일파, 민족반역자.

1899년 1월 18일에 인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월, 어렸을 적 이름은 기득이다.

개신교 신앙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고,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 했다. 그래서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다.

1907년 인천 영화학당에 입학했다가, 1908년 이화학당 고등과로 옮겨 1918년 3월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고등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이화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계몽과 복음 전도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1925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신흥우와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같은 달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모임인 망월구락부가 직업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위원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박헌영의 부인)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준비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운동과 인권운동에 힘쓴 동시에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1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땄는데,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이다.

이듬해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와 계몽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기독교 단체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김활란의 행적은 상당히 개념인이었다.

●친일파 김활란

그러나, 1936년 전후로악질 친일파로 변절했다.

아마기 가츠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계몽 분야에서 친일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제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하고,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엄청 많이 썼다.

특히 전시체제에 가면 갈수록 더욱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심지어 김활란은 자기의 여제자들을 위안부로 보냈다.

광복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회 교장을 맡앗다.

12월에는 이승만계열인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가담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은 후 초대 총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승인을 위한 홍보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UN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 해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 사장을 맡았다.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맡았고,

1959년 1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한국아시아반공연맹 부이사장과 한국여학사협회 회장을 맡았다.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의 건국실천원양성소의 강사로 있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김구와 이승만이 세웠다. 잘보면 강사진에 이인이나 김학규, 신익희, 조소앙도 있다.

1961년 금란전도협회를 조직해 농촌기독교전도활동을 전개했고, 대한기독교교육자협회 회장, 전국복음화운동 명예회장, 한국기독화운동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1963년 8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의 공익부문상과 미국 감리교회에서 주는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유언은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기독교인답게 이원론적, 영혼불멸적인 사상이 담긴 유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음악회로 치루어졌다.

 

모윤숙이 주도하여 설립한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았다는데 문제는 이 낙랑클럽이 겉으로는 여성들의 민간 외교단체라지만 사실상 유사 매춘 그룹이라는 지적이 많다.

김활란은 기독교인이자 여성운동가의 핵심적 인물이고 더욱이 명문 여대의 학장까지 하던 사람이 유사 매춘그룹의 총재를 했다는 어이없는 결론이 나오는 셈.

게다가 낙랑클럽의 여성들이 대부분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정신대지원 강요로 인하여 일본군의 성노예라는 지옥에 희생된 제자들에게 단 한마디로 사과하지 않았다.

●김활란에 대한 평가

하나는 한국 여성 박사 1호로 여성계몽운동 및 인권 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는 평가와, 다른 하나는 대표적인 친일파 여성으로 큰 비난을 받는다.

이화여자대학교와 개신교계에서는 김활란의 친일행적에 대해 변론을 하고 있다.

변론 내용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선 학생들 일부를 희생시켜야 했다라는 내용으로, 말 그대로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13살~25살 여제자들을 성노예로 강제징집한 것이 과연 교육자의 길인가.

더구나 김활란은 자신들의 여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낸 대가로 일제가 주는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순복음교회 관련지인 월간 신앙계에선 2000년 20세기 한국 개신교 위인 20인으로 그녀를 넣었다가 엄청난 비난을 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한민국 정부 직속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파로 규정했다.

대한민국 양대 초대형교회인 금란교회는 김활란이 1957년 조직한 금란전도대에서 시작했으며 금란이 김활란의 이름 중 2글자를 딴 교회이다.

YWCA의 설립자라는 점에서도 인상이 좋지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단체야 말로 문화 규제와 탄압에 앞장서는 집단으로 비난받고 있어 이대생들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 있는 김활란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김활란여성지도자상도 있는데, 수상의 요지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을 위해 헌신한 여성 지도자에게 주는 상이다.

한국 역사 상 중요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친일 행적이 있다는 사실에서 서정주와 비슷한 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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