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1호 노벨상은 일본의 한반도 강탈 돕고 받았다”

한미관계에 비수를 꽂은 장본인인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숨은 역사 2cm] 미국 1호 노벨상은 일본의 한반도 강탈 돕고 받았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월 말 정상회담을 열어 양국 현안을 논의한다.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핵 폐기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반도 배치 등을 다룰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해온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조정 등도 의제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 취임 50일을 전후한 시기에 열리는 이 회담은 역대 정부의 첫 한미정상회담 가운데 가장 이르다.

북핵 문제가 초미의 동북아 관심사이고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기류가 복잡하게 형성된 상황을 고려해 조기 회동을 하자는 제의를 미국이 수용해 회담이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약 6개월간 이어진 외교 파행을 하루 속히 끝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정부는 회담 개최를 서둘렀다.

한미정상회담 일정이 합의됨으로써 ‘코리아 패싱’ 우려는 씻을 수 있게 됐다.

코리아 패싱은 외교·정치적 실책 탓에 한국이 동아시아 역내 영향력을 잃어 국가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을 일컫는다.

정상회담에서 유익한 성과를 내려면 외교 당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다양한 물밑 접촉을 벌여 미국의 정확한 한반도 정책 방향을 읽고서 회담 의제를 둘러싼 이견을 최대한 좁히는 작업은 외교 당국의 몫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달 만에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대북 문제를 놓고 심한 견해 차이를 드러낸 전례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미국은 한미동맹을 전장에서 피로 맺은 혈맹이라며 수시로 우호관계를 강조하지만 과거사를 보면 신뢰를 저버린 사례가 적잖다.

일본이 한반도를 쉽게 강탈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도움 덕분이다.

한미관계에 비수를 꽂은 장본인은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1909년)다.

미국 대공황 당시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12촌 형이다.

루스벨트는 1903년까지만 해도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지 않았다.

주변국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일본을 억제하는 데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이런 각오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시아 변방 국가로만 여긴 일본이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기존 시각을 확 바꿔버린다.

아시아에서 미국 국익을 관철하려면 강력해진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은 이런 시대 상황을 반영해 체결됐다.

1904년 2월 시작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세가 뚜렷해지자 루스벨트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 장관을 일본에 급파한다.

태프트는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를 만나 협약을 맺는다. 만주와 조선에서 일본 우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필리핀에서 미국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내용이다.

이 협약은 양국 모두 극비에 부친 탓에 1924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1905년 10월 일본 언론이 밀약 사실을 일부 보도하고 미국 지식인들이 밀약 반대 시위까지 했는데도 대한제국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국제정보 수집력과 외교력이 형편없었던 탓이다.

고종은 순진하게도 미국이 나서서 일본의 한반도 주권 침탈을 막아줄 것으로 희망했다.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기대를 걸었다.

조선이 제3국의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중재하고 돕는다는 한미수호통상조약 1조를 철석같이 믿은 것이다.

러일전쟁 막바지인 1905년 8월 4일 고종은 외침을 막아줄 방패가 돼 달라고 미국에 호소하는 밀서를 써서 이승만에게 전달하도록 한다.

통상조약대로라면 루스벨트는 한·일 중재에 나섰어야 했지만, 밀서를 들고 온 이승만에게 싸늘했다.

밀서는 정식 외교 문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령을 거부한 것이다.

일본이 한일협약 후 대한제국 내정을 간섭한 탓에 정식 문서 작성이 어렵다는 사정을 루스벨트는 알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미 엿새 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리핀 지배권을 공인받으려고 일본의 한국 강탈을 묵인한 마당에 고종 밀서를 받을 리 없었다.

조선이 23년 전 미국에 문호를 열면서 맺은 통상조약은 루스벨트에게 한낱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메모 형태로 이뤄졌지만, 대한제국에는 대재앙이었다.

일본이 침략 야욕을 노골화해 불과 100여 일 만에 을사늑약을 맺고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늑약 체결 후 머잖아 미국의 가면은 벗겨진다.

대한제국과 수교한 국가 가운데 미국이 가장 먼저 외교공관을 철수한 것이다.

한반도를 바라보는 루스벨트의 의식구조도 문제투성이이었다.

한국을 국제 분쟁을 일으키는 말썽꾼으로 여기고 일본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루스벨트가 쓴 편지에 친일·혐한 시각이 잘 드러난다.

“한국은 부패하고 무능하다. 한민족은 문명이 뒤진 미개인이어서 자치 능력이 없다. 입헌군주국 일본은 지성과 활력이 넘쳐난다”

미국은 일본 침탈을 묵인하고서도 외교 사절단을 버젓이 조선에 보내는 얌체 짓도 한다.

루스벨트의 21살짜리 딸 앨리스와 태프트 장관 등 사절단 10명을 태운 미국 함대가 인천항에 들어온 것은 1905년 9월 19일이다.

이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지 이미 52일이 지났을 때였다.

사절단 도착 14일 전에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재확인하는 포츠머스 조약까지 맺어진다.

루스벨트 중재로 체결된 이 조약 2조에 “러시아는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 최고 이익을 일본이 갖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의 한반도 지도·보호·감리를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포츠머스 조약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최종적으로, 국제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미국 사절단은 일제의 한반도 강탈 장애를 말끔히 제거해준 지 불과 2주일 만에 태연하게 조선을 방문했다.

고종은 이때까지도 오판했다.

미국이 외교 사절단에 대통령 딸을 포함할 정도라면 모종의 큰 선물을 준비했을 것으로 고종은 기대했다.

앨리스 일행의 방한 기간 내내 최고 의전을 베푼 이유다.

인천 도착 때는 황실 악단이 미국 국가를 연주하며 환영했다.

사절단이 지나가는 도로는 거액을 들여 수리했고 앨리스는 황실 가마에 태워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황실의 이런 배려에 앨리스는 기고만장했다.

고종이 기다리는 만찬장에 말을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늦게 나타난 데다 옷차림은 예법에 크게 어긋났다.

반짝이는 장화를 신고 자주색 승마복을 입은 것도 모자라 시가 담배까지 꺼내 물고 긴 연기를 내뿜었다.

자유분방한 미국 외교가에서도 용인할 수 없는 무례한 태도였다.

조선 관료들이 왕실격식에 맞춰 경의를 표했을 때 앨리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등 딴청을 부리기도 했다.

고종 부인인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에서는 도 넘은 결례를 저질렀다.

명성황후 영혼을 호위한다는 뜻으로 무덤가에 세운 수호신 석상에 올라가 큰 소리로 사진 촬영을 요구했다.

돌발 상황을 지켜본 조선 관료들은 경악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앨리스 일행은 회의장에서도 술 마시며 웃고 떠들 뿐 외교 현안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종은 일제 침략에 대비해 미국 사절단에 군사동맹을 제의할 계획이었으나 그런 얘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시 앨리스는 일본 침략 계획을 이미 인지했다고 훗날 자서전에 썼다.

사절단 출국 때는 모든 대신(장관)들이 남대문 정거장까지 나가 허리를 굽히며 전송했다.

그런데도 앨리스는 고종에 모멸적인 회고록을 남긴다.

“환송 행사에 나온 고종은 황제다운 느낌이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했다”

일제의 한반도 주권 침탈이 임박한 순간에 미국 대통령 딸은 대한제국 황제를 농락했다.

사절단이 다녀간 뒤 약 2개월 만에 한국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최종 승인해준 덕분에 이듬해인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철저한 친일ㆍ반한 성향의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는 데 크게 기여한 역할이 동아시아 평화 업적으로 둔갑해 수상자로 선정됐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모로코 지배권을 둘러싸고 독일과 프랑스가 대결할 때 중재해준 것도 수상 공로에 포함됐다.

유럽이 독점해온 노벨평화상은 대서양을 건너감으로써 루스벨트는 비유럽권 최초 수상자가 됐다.

당시 미국에는 다른 노벨상을 탄 선례도 없었다.

루스벨트는 제국주의자로 불릴 만큼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수상 소식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1898년 미국이 쿠바를 점령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자 루스벨트는 국방부 차관보 자리를 걷어차고서 민병대를 직접 조직해 참전할 만큼 호전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미국 개입을 호소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한 국제연맹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올바른 외교정책은 부드럽게 말하며 큰 막대기를 드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루스벨트는 재벌의 시장 독점을 깨고 불법 파업에 강하게 대응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겨 미국 러시모어 산 큰 바위 얼굴 조각 때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세 번째로 새겨졌지만, 한국에는 최악의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만간 회담장에서 마주할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행적을 보면 루스벨트 데자뷔가 느껴진다.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미국은 한국과 100% 함께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가 최근에는 성주골프장 사드 배치 비용 10억 달러를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취임 100일 외신 회견에서는 “끔찍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재협상하거나 종료해야 한다”고도 했다.

부드럽게 말하다가 갑자기 큰 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양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짓밟도록 도와주고도 딸을 한국에 보내 마음껏 즐기도록 한 루스벨트의 이중성은 미국 외교의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은 미국의 오래된 대외관계 불문율이다.

현란하게 바뀌는 미국의 두 얼굴을 우리 외교 당국이 신속하게 간파하고 대응해야 한미정상회담이 성공할 수 있다.

ha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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