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아주 싫어하는 대만이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

2018년 1월 4일   정 용재 에디터

혐한하는 대만이 일본은 좋아하는 이유

대만은 언론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를 아주 싫어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작 대만과 일본은 꽤 친밀하다.

어느정도냐면 일본이 태평양 전쟁 패전 후, 본국으로 돌아갈때 “저희는 언제 따라가나요”라고 문의했을 정도..

대만총독부

 

대만은 우리의 서울대가 경성제국대학을 부정하는 것과 달리 국립타이완대학이 다이호쿠제국대학을 전신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까지 일본총독부 건물을 총통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죠.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제식민지였던 대만은 자신들을 착취했던 일본에게 왜 이리 호의적인 걸까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습니다이후대만은 일본의 영토로 할양되었습니다.

 

이때 대만에 거주하던 한족들이 청나라의 할양조치에 반발하여 항쟁하였으나 끝내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타이완 섬에서 대만총독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1945년 일본 패망 때까지 일본총독부 산하인 대만총독부 치하에 있었습니다.

 

군인 총독이 주도하는 억압적인 통치로 일관했던 조선과는 다르게 대만은 민간출신 각료가 온건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거기에 언제 대만을 집어 삼킬지 모를 중국을 견제해야 하기 위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으로 일본을 옹호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대만에도 일본군에 의한 대만 원주민 학살 사건이나 대만 원주민의 저항(우서 사건), 한족의 저항(타파니 사건등이 벌어진 점에서 보듯 순탄한 통치만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일본이 대만에 유화적인 정책을 필 이유는 정치적으로 서양열강들에 식민지 경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수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대만의 통치에 실패하면 히노마루 깃발의 빛은 실추한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대만 통치는 일본에게 중요했습니다.

 

또한고토 심페이 등 유능한 민간인 관료들이 자주 와서 대만을 통치했고사탕수수 재배를 바탕으로 식민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제적 발전을 이뤄낸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실제 일본인과 조선인대만인의 세부담을 본다면 1936년에는 일본인이 1인당 12~13대만인이 4~5조선인이 2~3엔 정도 꼴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오히려 대만의 근대화를 이루고 청나라나 다른 외세로부터 보호를 한 일본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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