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가 한국식 본명 감추고 일본 이름 쓰는 까닭

2015년 8월 5일
						
						

본명·통명 강요에 반발한 엇갈린 소송에 동포사회 주목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신동빈(시게미쓰 아키오·重光昭夫) 롯데그룹 회장, 신동주(시게미쓰 히로유키·重光宏之) 롯데홀딩스 부회장.”

최근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오너 형제가 서로 일본식 이름으로 부르자 네티즌 사이에서는 ‘일본 사람 아니냐’라는 비난이 터져 나오고 있다.

두 형제는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한 재일동포로, 뒤늦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들처럼 상당수 재일동포들은 본명(本名·한국 이름)과 통명(通名·일본식 이름)을 둘 다 갖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이름을 달리 쓰고 있다. 최근 재일동포들의 이름 사용을 둘러싼 소송이 잇따라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 법원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거나 판결이 난 두 재판은 재일동포가 부당하게 본명, 혹은 통명 사용을 강요당한 것에 대한 반발이 주요 쟁점이다.

첫 번째 사례의 주인공은 시즈오카(靜岡)현에 거주하는 재일동포 제신일(諸信一) 씨. 그는 사장이 직원들 앞에서 3차례에 걸쳐 야마하라 신이치(山原信一)라는 통명 대신에 본명(한국 이름)을 쓰라고 강요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며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본명 강요 재판’으로 불리며 주목을 받은 이 소송에서 시즈오카 지방법원은 지난 4월 24일 제 씨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장에게 위자료로 55만 엔(약 518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재일동포가 일상생활에서 본명과 통명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전제한 뒤 “야마하라 신이치라는 이름을 쓰고 있음에도 본명을 쓰라고 강요한 것은 사회 통념상 크게 불쾌감을 준 일이며 자기결정권과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고 밝혔다.





피고인 사장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고 9월 2일에 도쿄고등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두 번째 사례는 오사카에 사는 일용직 노동자 김임만(金稔万) 씨가 건설 현장에서 통명 사용을 강요받자 회사와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낸 것이다.

오사카 법원은 1·2심 모두 “회사가 강요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청구를 기각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김 씨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지난해 10월 15일 최고재판소는 상고 수리를 거부했다.

김 씨의 재판을 응원한 사람들의 모임인 ‘이름카라’는 판결을 비판하며 ‘당연하게 본명을 밝힐 수 있는 사회’란 제목의 운동을 온·오프라인상에서 펼치고 있다. ‘카라'(から)는 ‘∼부터’라는 뜻의 일본어로 ‘이름카라’라는 단체명은 ‘이름부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두 사례가 주목을 받은 것은 폐쇄적인 일본에서 사는 재일동포들이 차별에 맞서거나 또는 차별을 피해 본명과 통명을 사용해야 하는 힘겨운 현실이 수면 위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소송은 한국 이름 대신에 통명을 쓰라고 강요받은 것에 대한 반발이었으나 시즈오카 재판의 사례는 정반대여서 동포 사회는 상급심의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재일동포 사회는 1970년대 일본 정부의 지문 날인 등 차별적인 조치에 맞서면서 ‘본명 부르기 운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1년 재일동포 구정주자(올드커머)에 대한 특별영주권이 인정되자 정주화 경향이 가속화돼 통명 사용이 일반화됐다.

제 씨는 판결 후 “위자료 액수보다 내 주장을 인정받은 것에 만족한다”면서 “나는 일본인이라 생각하며 앞으로도 통명을 쓰며 살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해 특별영주 자격을 얻은 구정주자다.

재판 결과에 대해 재특회(재일 조선인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임)를 비롯해 일본 우익 단체들은 “통명은 가짜 이름인데 본명을 쓰라는 것이 왜 문제냐”라고 반문하며 “통명은 ‘사회적 위장'”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재일한국인연구자포럼(대표 유혁수)은 지난 7월 18일 도쿄에서 ‘본명 강요 재판’에 관한 연구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유 대표를 포함해 재일법조포럼의 이우해 변호사, 무국적연구회 대표인 오다가와 아야네(小田川綾音) 변호사, 일본식 이름이 아닌 한국 본명을 쓰는 귀화자 윤소자 씨, 헌법학자 다테다 아키코(館田晶子) 홋카이가쿠엔(北海學園)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유혁수 요코하마(橫浜)국립대 교수는 5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연구회 참석자들은 법원의 판결을 환영했지만 재일동포가 차별을 피해 통명을 쓸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언급이 판결문에 없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유 교수는 “80년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신정주자(뉴커머)는 대부분 본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일본에서 살아온 구정주자(올드커머)나 귀화자 등은 대부분 통명을 써온 게 현실”이라며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 사회 차별의 부산물 중 하나가 통명”이라고 진단했다.

오다가와 변호사와 다테다 교수는 “인격권의 핵심인 이름 사용의 자기결정권은 존중되어야 하므로 판결에 동의한다”며 “판결을 계기로 일본 사회가 역사적·사회적으로 재일동포에게 통명이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회 참석자들은 통명을 쓰지 않으면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받기 때문이라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시즈오카 재판과 관련해 민단 관계자로부터 ‘한 사람이 두 개의 이름을 쓰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며 본명을 쓰는 게 당연하다. 통명은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만들어낸 식민지 시대의 부산물로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일본에서 본명으로 취직하기 어려운 현실부터 고쳐야 할 것’이라고 들었다”고 소개했다.

이수경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대 교수는 “신분이 확실한 교수나 변호사인 재일동포가 방을 구할 때도 주인이 ‘조선인에게는 안 빌려주겠다’며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 “살기 위해, 생활권 확보를 위해 피치 못해 통명을 쓰는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통명 사용을 사회 전반이 허용하는 현재의 분위기도 조만간 바뀔 처지에 놓여 있다.

일본 정부가 2012년 7월부터 적용한 신출입국관리법으로는 특별영주자 등 외국인 재류카드의 이름 표기를 영문을 원칙으로 하고 본명 한자 표기를 함께 적게 해 통명 기재가 불가능해졌다.

최근 일본 후생성(보건복지부)은 앞으로 후생 행정에서 통명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유 교수는 “재특회 등 우익단체들이 재일동포의 특별영주 자격과 통명 사용을 ‘특권’이라고 비판하고 있어 오히려 이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의식한 일본 정부가 전면적으로 통명 사용 제한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며 “재일동포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해소되지 않는 한 당분간 통명 사용은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wak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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