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정말 “만 리의 나라”로 불렸을까? 이에 대한 이야기는 『고려사절요』에서 “고려는 만 리의 나라다. 일찍이 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다”라는 기록으로 시작된다. 이 기록은 쿠빌라이가 고려 태자의 항복을 받은 사실에 기반해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의 독특한 점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고히 하면서도 동시에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을 새로운 국가로 재정립했다는 점이다. 특히 고려는 중국에 처음으로 조공한 923년 후량-후당 교체기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에서 미스터리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후량조차도 고려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 혼란 속에서 고려를 대단히 독립적인 존재로 여긴 듯하다.
고려의 존재감은 후당 신하들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후당의 신하들은 고려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문서를 통해 고려의 위상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는 나라에서 조공을 바치러 왔는데 대체 어떤 나라인가?”라는 당황스러운 반응은 중국이 고려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자신들의 건국 내력과 왕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렸고, 이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확립했다. 특히 고구려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새로운 고려 왕조의 출발을 명확히 하려는 모습이 돋보인다.
한편, 이러한 기록을 남긴 송나라 학자들은 고려의 부활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고려는 멸망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다시 돌아온 것뿐이다”라는 표현은 당시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고려는 송과의 교류에서 자신만의 독립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결론적으로, 고려는 단순히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이미지를 넘어, 동아시아 외교 무대에서 독특하고 강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고려는 그 신비로운 위상과 함께 강렬한 인상을 남긴 국가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