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환자가 몇명인지도 몰라 힘들었다” 의료진 고백

2015년 10월 21일   School Stroy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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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병원, 국내병원 최초 메르스백서 발간
서울대 유명순 교수팀, 의료인들이 게시판에 붙인 포스트잇 분석

(서울=연합뉴스) 채새롬 기자 =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사태 때 환자를 돌봤던 의료진은 정보 부족과 외부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가장 마음고생이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메르스 최전방에서 싸운 일선 병원이 메르스 예방과 대응, 이후 의료진의 심리치료 과정을 담은 백서를 준비하면서 의료진을 상대로 심리 상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은 메르스 백서를 이르면 이달 말 발간할 예정이라고 21일 밝혔다. 지방자치단체 중 메르스 백서를 발간하거나 준비하는 곳이 있지만, 개별 병원 차원에서 메르스 당시 대응과 의료인들에 대한 심리지원 프로그램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등을 담아 백서 형태로 발간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이런 기록을 통해 제2의 메르스 사태를 예방하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 “메르스 환자 병원에 몇명 있는지 직원인 나도 몰랐다” “병원에 몇명의 메르스 환자가 있었는지 궁금했고 혹시나 가족에게 전염될까 봐 나도 걸릴까 두려웠다.” “병원의 소식을 직원이 먼저 알아야 하는데 기사 검색으로 찾아야 하는 직원의 마음을 아시나요.”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명지병원의 의뢰를 받아 의료인들이 심리 치료 프로그램에서 적어낸 글을 분석한 결과 의료인들은 병원 내 메르스 환자 발생 등 정보를 공유하지 못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조사는 명지병원 백서 편찬 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병원은 메르스에 대응하느라 힘들었던 것을 적는 ‘속앓이 날리기’ 게시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적는 ‘의우애’ 게시판을 만들어 의료진에게 포스트잇을 붙이도록 했다.

두 게시판에는 300여개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연구팀이 ‘속앓이 날리기’ 게시판에 붙은 156개 포스트잇에서 글의 내용을 24개 범주로 나눠 살펴본 결과 ‘정보 공유 부재’가 28건으로 가장 많았고 ‘고위험 전파자로서 받는 차별'(17건)이 뒤를 이었다.

의료인들은 포스트잇에 “보호자와 환자들이 계속 물어보지만 아는 게 없어 설명을 못 해 답답했다”고 쓰거나 “의료인은 ‘메르스 숙주’라는 주변의 시선을 느꼈고 친구들이 안 만나주고 가족마저 나를 피했다”고 털어놨다.

확실한 정보를 말할 수 없어 정보를 숨기거나 거짓말한다고 비난받은 경험(16건), 대중이 물어보는 것에 대해 계속 답해야 하는 상황(11건), 부정확·부적절한 업무 방침(10건) 등 경험도 스트레스를 줬다.

정보 공유의 부재는 공포, 분노, 슬픔 등 감정과 연관이 깊었고 고위험 전파자로서의 차별은 주로 슬픔의 감정과 연관이 있었다. 비난은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연구팀이 포스트잇 글을 감정별로 범주화해 보니 ‘분노’ 감정의 빈도가 31건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공포'(30건), ‘스트레스'(23건), ‘슬픔'(22건) 등 순이었다.

‘의우애’ 게시판에서는 총 135개 포스트잇에서 71개의 감정 연관 단어를 추출했는데 대부분이 기쁨의 감정과 연관돼 있었다.

의료인들은 ‘감동’, ‘감사’, ‘뿌듯하다’, ‘긍지가 느껴진다’, ‘자랑스럽다’, ‘자신만만하다’ 등 단어를 쓰며 서로 토닥였다. “다 함께여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는 내용의 포스트잇 글도 많았다.

유명순 교수는 “메르스 사태 후 정부와 미디어, 국민에 대한 조사와 평가가 주를 이뤘지만 병원 일선 근로자의 경험이 연구된 것은 사실상 처음”이라며 “이 같은 의료인들의 감정 연구를 다음 감염병 위기상황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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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스 1년 전부터 감염병 대비…메르스 치료 중 의료진 심리지원

백서에는 병원의 메르스 대응 준비부터 진료 당시 상황, 의료인들을 위한 레질리언스(회복) 프로그램과 위기 대응 프로그램까지 병원이 메르스사태와 관련해 진행했던 모든 기록이 담긴다.

명지병원은 작년 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메르스 환자가 대거 발생하자 그해 6월 감염내과 이꽃실 교수의 주도로 신종감염병 대응체계 구축 전담팀을 발족했다. 국내에서 메르스가 발병하기 1년 전이었다.

또 신종감염병 대응조직(CDRT)을 구성하고 신종 감염병 환자가 발생한 상황을 대비해 전체 모의 훈련도 여러 차례 했다.

병원은 5월29일 평택 성모병원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12번 환자를 받아 진료하기 시작해 6월23일까지 추가 감염 없이 메르스 확진자 5명을 모두 완치했다.

메르스 환자 정보에 대한 외부 공개를 금지한 정부의 초기 지침 때문에 당시 의료인들은 병원에 환자가 있는지, 있다면 몇 명이나 있는지 등 기본 정보도 공유하지 못한 채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병원 관계자는 “당시 병원 옆에 있는 놀이터에서 아예 병원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기도 하고 병원에 다닌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았다”며 “의료인들은 메르스 최전방에서 애썼지만 동시에 희생자이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의료인들의 스트레스가 문제가 되자 병원은 메르스 치료 중인 6월 초부터 심리지원 프로그램인 레질리언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특별 원내 세미나를 시작으로 전직원 대상 설문조사를 거쳐 병원 직원들이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나누고 힘들었던 것을 털어놓게 하는 ‘속앓이 미팅’을 열기도 했다.

정신건강의학과 김현수 교수는 “설문 결과 병원직원 다수가 경증 이상의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며 “감염병 재난현장인 병원에서 의료인들에게 심리지원을 하는 것은 재난대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srch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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