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을 깔보고 비웃다가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처형당한 일본 사신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일본 국사가 조선을 찾아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 : 야 씨, 우리는 맨날 니네한테 사신보내는네 니네는 왜 우리한테 사신 안보내?? 우리 얕보냐? 통신사 보내!!
이 때의 사신은 귤강광(橘康廣 : 타치바나 야스히로).
조선왕조실록에선 이 때를 이렇게 묘사한다.
“서신의 사연이 매우 거만하여 ‘천하가 짐(朕)의 손아귀에 돌아왔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귤강광도 사납고 거만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여 말할 적에는 문득 조롱하고 비난하였다.”
즉, 사신단도 그렇고 히데요시의 서신의 내용도 그렇고 매우 거만했다는 것.
특히 귤강광이 조선에서 저지른 2번의 건방진 행동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첫번째는 위 조선왕조실록 기사의 바로 아래에 전하는 내용이다.
“이때 교리 유근(柳根)이 선위사(宣慰使)였고 예조 판서가 압연관(狎宴官)이었다. 귤강광이 고의로 연회석상에서 호초(胡椒)를 흩어놓으니 기공(伎工)이 앞을 다투어 그것을 줍고 전혀 질서라고는 없었다. 귤강광이 객관에 돌아와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 나라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거의 망하게 되었다.”“
일부러 귤강광이 연회석상에서 사치품인 후추를 뿌리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주우려고 난리가 났던 것
그것을 보고 귤강광이
“나라 기강이 이모양 이꼴인거 보소 다 망했네!!”
라고 비웃은 것이다.
두번째는 연려실기술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사신으로 왔던 귤강광은 그때 나이 50여 세로 얼굴이 큼직하였는데, 행동이 거만스러운 것이 전날 왜사와는 아주 달라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올 때 인동(仁同)을 지나면서는 창을 잡은 자를 흘겨보며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다.” 하고, 상주(尙州)를 통과할 때, 목사 송응형(宋應泂)이 나와 접대하는 자리에서 통역을 시켜 목사에게 조롱하기를, “나는 수년 전장에 있어 머리털이 세었거니와 당신은 음악과 기생 속에 파묻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머리털이 센 것은 웬일인가.” 하였다.“
조선의 병기를 트집잡고, 상주목사에게 ‘니 아무것도 안하는데 머리 하얘진건 왜그럼? 난 전쟁 엄청 해서 스트레스받아서 하얘진건데 ㅋㅋ” 이런 식으로 놀렸다는 것.
조선에서 안하무인격으로 계속 조선을 비웃었던 그.
그러나 조선 조정은 히데요시의 통신사 요청을 거절한다.
“물길이 험하여 보낼 수 없다” 면서 거절한 조선.
그리고 그 답서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 귤강광은

히데요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냥 죽음도 아니고 멸족….
히데요시는 그가 조선 편을 들어서 일부러 히데요시의 요청을 거부하도록 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던 것.
“귤강광이 돌아갈 적에 그 서계(書契)에 답하되 ‘수로(水路)가 아득하여 사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수길이 크게 노하여 귤강광을 멸족하였는데 귤강광이 우리 나라에 편을 들어서 그 소청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의심해서였다.“
조선에서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돌아다니다가
돌아가자마자 조선을 편든 것으로 의심당해 죽임을 당한 그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라 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