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쓰는 돈만 2억’ 억만장자 아드난 카쇼기의 이야기

2017년 11월 23일   정 용재 에디터

“그는 특별한 사랑꾼이다.”

20살이 넘는 나이 차이와 자신보다 훨씬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아드난 카쇼기(Adnan Kashoggi)의 정부였던 80년대 유명 모델 질 도드(Jill Dodd)가 아드난 카쇼기에 대해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최근 영국 일간 미러(Mirror)에서는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무기 거상 아드난 카쇼기의 일대기가 소개되어 많은 누리꾼들의 관심을 모았다.

올해 6월 초에 81세의 일기로 런던에서 사망한 카쇼기는 일부다처제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법에 따라 세 명의 정실 부인과 열한 명의 ‘첩’들을 두었다.

질 도드가 1980년 카쇼기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겨우 21살에 불과했다.

프랑스 칸느에서의 첫 만남 당시 질은 대머리의 키 작은 카쇼기가 그녀의 아빠 친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날 밤 카쇼기는 질의 팔에 자신의 피로 ‘I love you’라는 글씨를 썼다. 

다음 날 밤 카쇼기는 자신의 요트에서 열린 만찬에 질을 초대했다.

질은 명품 드레스로 가득 찬 카쇼기의 선실에서 회색 랑방 드레스를 골라 입고  만찬에  참석했다.

이미 두 명의 아내를 둔 카쇼기는 그 후 몇 달 간 질에게 정신적인 사랑만을 보여왔다.

그는 심지어 질을 자신의 한 살 배기 아들 알리의 생일 파티에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의 둘째 부인 라미아(Lamia, 본래 이탈리아 출생인 그녀의 본명은 로라 비앙콜리니였다.

그녀는 후에 카쇼기와 혼인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라미아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는 남편의 새로운 첩을 냉정하게 대했다.

카쇼기의 마르베야 저택에서 보낸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카쇼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질 도드는 어느 날 밤 중에 카쇼기가 깨워 일어난다.

카쇼기는 질이 옷을 다 벗는 것을 지켜본 뒤 함께 거품 목욕을 즐겼고, 그녀에게 한 가지 특별한 조건을 물어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정부가 되어 세계 여러 나라를 함께 돌아다니자는 제안이었다.

질은 제안을 받아들여 카쇼기의 안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때때로 LA 패션 스쿨의 학비를 지원하는 것과 같이 그녀의 대부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연인의 도움 덕분에 그녀는 1980년대 후반 서핑, 스노우 보딩 의류 브랜드인 록시(Roxy)를 창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도드와 거대 무기상의 관계는 1982년에 막을 내리게 된다. 질은 카쇼기의 안방에서 자신이 서서히 밀려나게 되는 것을 직감한다.

카쇼기는 새롭고 더 젊은 모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올해로 57세인 질 도드는 자서전 ‘사랑의 화폐: 내면의 사랑을 찾기 위한 용감한 여정’에서 카쇼기의 좋은 점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카쇼기와의 관계에서 소중한 가르침을 배웠다.

사랑도 돈도 결코 내면의 평화와 진실성을 희생할 만한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카쇼기는 칸느, 파리,  마드리드, 런던과 같은 값비싼 지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총 12채의 집을 보유하고 있었다. 뉴욕에 위치한 그의 아파트는 총 16채를 한꺼번에 합친 거대한 규모였다. 또한 스페인 마르베야에는 그가 광란의 파티를 벌였던 별장이 있었다.

이외에도 카쇼기는 100대의 리무진, 개인 요트 세 척, 그리고 미스터 킬(Mr. Kill)이라는 별명의 한국 출신의 보디가드를 소유하고 있었다.

카쇼기가 소유했던 요트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나빌라(Nabila, 첫째 딸의 이름) 호는 8천만 달러(한화 약 870 억 원)에 달했으며 내부에는 카쇼기 본인의 얼굴 모양의 레이저 빔이 쏘아지는 화려한 디스코와 11개의 게스트룸, 선상 병원, 시체 안치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이 배를 1983년 007 시리즈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의 촬영에 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불안한 위치에 있던 카쇼기의 애첩들은 그의 복잡하고 사치스러운 인생의 일부분만 보고 있었다.

부인과 정부들은 본인들이 받아온 다이아몬드 반지와 랑방 드레스를 살 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카쇼기의 은밀한 무기 거래 사업은 그를 둘러싼 각종 의문에도 불구하고 비밀로 지켜졌다.

아드난 카쇼기는 1935년 성지 메카에서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 이븐 사우드의 왕실 의사의 6 명의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카쇼기는 이집트에서 학업을 마치고 캘리포니아의 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21세의 나이에 3백만 달러(한화 약 32억 원)에 달하는 트럭들을 이집트에 판매함으로써 15만 달러(한화 약 1억 6천만 원)의 수수료를 챙기는 첫 번째 사업을 성사시켰다.

별로 놀랍지 않게 카쇼기는 이후 대학을 그만두고 기반이 불안정한 자유로운 사업가로 일하면서 경력과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다. 그는 이 시기에 노스롭, 록히드, 크라이슬러, 피아트, 웨스트랜드 헬리콥터 사, 롤스로이스와 같은 주요 무기 회사들과 사업을 벌였다. 카쇼기는 주로 각국 정부들을 대상으로 무기 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위험한 권력의 중심으로 향하게 되면서 카쇼기는 그의 글로벌 엘리트의 입지를 잃게 한 중대한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다.

1987년 카쇼기는 80년대 최악의 정치 스캔들인 이란-콘트라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당시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인 포로들을 석방해 주는  조건으로 이란에 무기들을 팔아넘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니카라과 반군들을 지원한다.

당시 카쇼기의 사업은 레바논까지 뻗어 있었으며 헤즈볼라 테러리스트들과 연관되어 있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아드난 카쇼기는 중요 중간업자로 지목되어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는 1988년에 스위스에서 횡령 혐의로 체포되었다. 3개월 간의 감옥 생활 끝에 카쇼기는 미국으로 이송되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스캔들은 1980년대 말까지 카쇼기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는 1989년에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비자금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뉴욕 검찰에게 기소 당했다.

이후 1990년대에 이어진 수 차례의 재판으로 카쇼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8년에는 런던 리츠 카지노에서 1986년에 졌던 10만 파운드(한화 약 1억 5천만 원)의 빚을 압류 당하는 등, 그는 호화로웠던 80년대의 후폭풍을 정면으로 맞아야만 했다.

말년에 카쇼기는 런던과 모나코를 전전하며  손에 남은 4백만 달러(한화 약 43억 원)만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는 대중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진 채로 파킨슨 병에 시달리다가 2017년 6월 런던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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