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지금까지 실패한 쿠데타 사건 TOP. ㅎㄷㄷ;;;

2018년 10월 17일   School Stroy 에디터

이 글은 북한의 쿠데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뉴스에 크게 보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 이지만, 탈북자들의 말과 대북한 정보가 공개되면서 북한 내부의 쿠데타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중 대표적인 몇몇을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1. 프룬제출신 쿠데타 모의사건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북한에서는 한군전쟁의 전사자들의 유가족인 혁명유가족과 항일투쟁의 자제들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최고의 출신성분으로 북한 사회로 부터 받을 수 있는 모든 교육적 혜택을 누려왔고 생활역시 확실하였습니다.

군사엘리트로 키우기 위해 이들 중 일부는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김정일의 애착은 엄청나 김정일은 항상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과 같이 싸울 이들이라며 이들을 칭찬하곤 했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북한은 당시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러시아 프룬제 종합군사학교에 유학을 보내기로 합니다.

이렇게 돌아온 이들은 프룬제 출신으로 불리며 북한 인민무력부 등 북한군부 주요요직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들이 북한이 자랑하였던 전후 엘리트, 북한군의 엘리트 중 엘리트 였습니다.

김정일의 신뢰도 두터웠고 북한 사회에서도 착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올라가던 이들이었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신뢰하는 김정일의 존재였습니다.

북한 밖의 세상을 바라보고 러시아에서 선진 사상과 교육을 받고 북한으로 돌아온 이들은 북한내 누구보다 국제정서에 밝았고 이러한 이들의 눈에는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어온 우상화 작업과 김정일의 후계자 선정이라는 권련의 세습화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최고의 엘리트 계층으로 북한내 핵심세력이었고, 김정일과 선후배 사이로 김정일에 대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북한 최고의 수재집단은 이러한 북한의 현실이 비정상적으로 비춰졌고 김정일의 후계자 선정에 대해서도 불만이 대단했습니다.

한동안 이들은 그러한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지내왔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것은 공산주의와 소련연방의 붕괴였습니다.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소련이 붕괴한 이러한 극박한 세계정세의 변화에서 프룬제 출신들은 더이상 선택이 없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중 안종호 상장이 있었는데, 이는 만경봉대학원, 남산학교를 거친 후 프룬제로 유학을 다녀와 작전부 처장과 전투훈련국장을 거친 최고의 엘리트 였고, 인망 역시 두터웠습니다. 결국 안종호 상장은 프룬제 유학파들을 결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제거를 계획합니다.

 

조선 인민군 창설 60주년이 되는 1992년 4월 25일

사열식이 거행될때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위치한 주석단을 사열식에 참여한 전차포로 날려버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솔직히 저격총이나 폭탄으로 암살하는 경우는 사료로 많이 접하지만 전차포로 암살한다는 계획은 정말 획기적입니다.]

더불어 쿠데타 성공 후 대외지원을 위해 당시 북한과 마찰을 빗고 있던 소련과 접촉 소련의 차후 지원을 약속받습니다.

원래 사열식에 참석하는 전차는 김일훈 소장의 수도방위사령부 전차사단 소속으로 그 역시 프룬제 유학파 출신이었고, 모든게 계획대로 진행되나 싶었는데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인민무력부 박기서 국장은 인민무력부 주체 행사에 수도방위사령부의 전차를 사용하는것이 불만이었고, 박기서는 김일성의 고종사촌이라는 인맥을 동원하여 수도방위사령부의 전차를 인민무력부 전차로 바꾸게 됩니다.

이 우연이 북한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프룬제 출신들은 이일로 쿠데타를 포기하였다기 보다는 계획이 지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비밀을 지키면서 훗날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계획의 변경에 소련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였고 끝내 KGB쪽에서 정보가 유출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고, 이들 모두 숙청되었습니다. 일부는 러시아로 도주합니다.

더불어 모든 유학생을 철수시키고 승승장구하던 친러파가 북한 내에서 세력이 급속히 위축되게 됩니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 북한 군부는 국내파가 주요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김정일의 친위세력 역시 극단적으로 소실되게 되어집니다.

이 사건은 굉장히 중요해서 북한내부의 세력 이후의 정치 외교 등의 면에 영향을 미쳤고, 무엇보다 김정일에게 어떤 것보다 더 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정일 입장에선 어려서부터 같이 동문수학하여 누구보다 신뢰하던 선후배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었으니까요.

 

2. 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


사실 6군단의 쿠데타 모의사건은 그 진위가 위심받았습니다.

쿠데타를 모의한것이 아니라 숙청을 위한 핑계가 아닌가 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것은 통일이 된 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미 행정부 극비문서에 이 근거가 되는 문서들이 존재한다고 하고 군부에선 이 사건의 파장이 컸기 때문에 지금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6군단은 북한의 함경북도에 위치하며 청진에 사령부를 두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6군단의 쿠데타가 의심받아왔던건 6군단은 평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접근이 어렵고, 전방지역이 아닌 러시아 접경지역에 위치하여 무장상태도 높은 편이 아니어서 였습니다.

당시 6군단은 청진에 사령부를 두고 3개 보병사단과 4개 방사포여단 1개포병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쿠데타 모의는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로켓포를 발사하며 항만과 기지를 점령한 이들은 평양으로 진격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주장은 군단 예하 부대 지휘관에게 확산되었고 급기야 함경북도 간부급이 대거 가담 알려진 바로는 함경북도의 군, 당, 행정 책임자 대부분이 이 쿠데타 모의에 가담하였다고 합니다.

나진선봉 자유무역지구와 중국, 러시아와 접경에 위치한 6군단은 쿠데타에 필요한 군자금은 밀수등을 통해 모은 달러로 충단하였습니다.

6군단장이었던 김영춘은 김일성과 친인척이었기에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러한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는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이러한 쿠데타 모의를 눈치챈것은 군 보위국이었습니다.

6군단은 쿠데타군을 확대하기 위해 과도한 달러를 유통하였고 이 과정에서 보위국의 수사망에 걸려들게 됩니다.

결국 장성급을 포함 군 간부 40여명을 포함하여 3-4백명을 숙청하였고, 쿠데타 모의의 관계의 가족 및 친족 사돈 등 6촌까지 모두 처벌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6군단은 군단내 사단이 다른 군단 사단들과 교체 되었습니다.

 

사건이 보위국에게 발각되기 전까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6군단장 김영춘은 이후 진압과정에 가담 승진하게 됩니다. [ㅡㅡ;;]

앞서 말했듯. 6군단은 평양과 너무 떨어져 있어 접근이 용이하지 않고 무장상태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 방법에 대해서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후 탈북자들로 부터 두가지 계획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 6군단내 한 특공대가 평양에 침투 김정일 집무실과 조선중앙방송국을 점령하면 6군단의 주력이
이 쿠데타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군사작전에 돌입 평양의 주요 군사지휘시설을 급습 지위체계를 마비시킨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 6군단의 자체 화력만으론 이러한 일을 벌이기 힘들며 이러한 한계를 알고 있는 지휘부는 쿠데타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보위국에 사건이 발각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세력이 아무리 확대되었다고 해도 이 계획은 현실성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2. 제일 현실성 있다고 알려진 계획은 이렇습니다. 6군단은 단독으로 평양을 장악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국군 및 미군을 나진항으로 끌어들여 북한 후방을 점령하고, 이 동안 6군단은 평양을 급습 지휘계통을 마비시킨다는 것입니다.

미 행정부 극비문서에 기록되어있다면 미국측에는 어느정도 정보가 흘러들어갔다는 소리인데
우리나라는 이 일에 어느정도 관여했는지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출처  – 다음 밀리터리, 군사 무기 카페

24살 아재가 “여고생 이모”를 두면 생기는 일ㅋㅋ

너희 혹시 너네보다 나이 많은 이모 있음?

난 있다….

엄마가 지금 45이셔

할머니는 65세

이모는…..18살….

그러니까 할머니가 47세때 애를 낳으신거….

존나 웃기지 않냐?

나는 24살

부모님이 일찍 결혼하셨거든

누나랑 동생까지 있으니까… 울가족 가정사는 여기까지…

암튼 진짜 웃긴다…

방학했거든 할머니집도 같은 동네 아파트라서 가끔 가다 마주친다..

근데 나 볼때마다 조카~~

이러는데 진짜…..오싹하다..

뒤돌아서 하하하 억지로 웃고 손한번 흔들어주고 다시가…

근데 꼭 옆에 와서는

어디가? 뭐하러? 누구랑? 언니(엄마)한테 말해야지~

하는데….. 쥐어박아버리고싶다

근데 나보다 윗사람이야…

그래서 구구절절 답해주고 같이 집가고 그런다..

집에서 같이 저녁먹을때도

아빠도 처제라는 호칭쓰고ㅋㅋ 이 어린 이모도 형부라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어색하다…

그리고 저녁먹고 엄마는 또 집에 데려다주래

그럼 또 터덜터덜 슬리퍼 끌고 나간다

가다가 이모친구라도 만나봐..

“어 너희 오빠야?”

“아니ㅋ 내 조카ㅋ”

“뭐? 조카?”

“안녕하세요…”

“아예….근데 몇살이세요?”

“24살이요..”

“아…예..”

한다…진짜 개쪽팔려…

어제 낮쯤에늘 또 이모한테 전화와서 자기 체육복좀 가져다주래…

아….어째 옆에 엄마도 듣고 있었고 할머니가 가기는 그렇잖아…

그래서 할머니집 들려서 체육복 가지고 이모한테 갔다 고등학교에…

내가 졸업한 학교에…..ㅅㅂ

가서 전화했지

“여보세요?”

“이모…나왔어..나와”

“잠깐만 한 5분만 기다려ㅋ”

그리고 한 5분 멀리서 지 친구들이랑 달려오더라…

그냥 두고 도망갈까? 하다가 말았다

그리고 내앞에 와서 “봐 얘가 내 조카야ㅋㅋ”

“우와~! 안녕하세요ㅎ”

“아예….”

“ㅋㅋㅋ좋지 조카야ㅋ 이렇게 이쁜이모가 친구들도 보여주고ㅋ”

“하…됐네요 엄마가 과일 싸줬어 친구들이랑 먹으래”

“언니가? 알았어 고맙다고 해줘ㅋ”

이렇게 잘 끝나면 될겄을 이모친구가

“이모라고 한번만 해주세요ㅋㅋ”

“예?…”

“이모라고 한번만 해주세요ㅋ”

“아….예….”하면서 이모 눈치보는데 좀 미안해하는듯 하더라..

근데 뭐 어째 이모를 이모라 부르지뭐

“이모 나 이제 갈게ㅋ”

하니까 애들이 꺅! 하면서 소리지르더라…

한번 웃고 이제 갈라고 했는데 이모가 “야 잠깐 이거 가지고가ㅋ”

하면서 옛날에 매점에서 사먹던 빵이랑 바나나우유주더라ㅋ

“어 고마워ㅋㅋ” 하고 기분좋게 받고 나왔다

집에오면서 그거 먹는데 옛날 생각나더라ㅋ

이모가 참 고맙더라

그래서 나도 이모 대하는데 좀 편해졌음

하는짓도 보면 귀여움

같이 가다가 갑자기 벌래 기어다닌다고 쭈구리고 관찰하질 않나

시내에서 집가는 버스타면 맨뒷자리에서 입벌리고 기분좋게 자고있질않나

쓰레기버리러 재활용하는데 가고있으면 테라스에서 “조카~!!!”하면서 손흔들면서 웃고 있고

그전에는 더 어려서 말도 잘안하고 그랬는데 좀커서 나한테 하는거 보니까 귀엽다ㅋ

그래도 최대한 이모존중은 하고 그런다

이모라고 한번 불러주면 기분좋아서 아이스크림 한나는 얻어먹음ㅋㅋ

그래서 왜 쓰냐고? 걍 써봤다ㅎ


고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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